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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지금 부탁하시는 거 맞죠?

12D, 13D. 엄마쪽 가족들이 사는 부산에 내려가는 SRT열차 좌석 번호다.

자리가 없어 앞뒤로 앉는 좌석을 예매하게 됐다.

폭이 좁은 열차 간이 계단을 밟고 8호차에 올라타 일, 이, 삼…구, 십,십일 남편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고, 남편과 나는 계속해서 모바일 표와 창가 쪽 좌석 번호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불안한 눈빛을 보내던 13D 승객은 이제다 싶었는지 말문을 떼었다.

 

제 자리가 11C거든요. 근데 얘랑(12C에 앉은 청소년을 가르키며) 일행이라

말씀이 끝난 건지, 그래서 지금 나는 여기를 앉겠다는 포부를 밝히신 건지 확실치 않았다. 그저 서있었다.

그러니 저기.”하며 상체를 들어 손가락으로 두 좌석 뒤를 손가락으로 친히 가리켜 주셨다.

 

, 저도 11C가 저기 인건 아는데요. 지금 부탁하시는 거 맞죠?

나의 예민 게이지가 올라가는 걸 인지했는지 남편은 그냥 그 좌석에 앉았다. 좌석 아래 콘센트에 노트북 충전기를 꽂으며 나 또 예민했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런 걸 쓰려고 블로그를 만들었었지 하며 작은 간이 테이블에 노트북 전원을 켰다. 방금 너무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열차에 올라타서 기분이 좋았는데 아깝다. 이름도 어려웠던 블론드 바닐라 더블샷 마키야토.

 

 

부탁과 예민함에 대한 또 다른 에피소드.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누구나 보았을 그 자리의 그 사람. 분명 임산부를 위한 자리인데 생물학적으로 임신하실 수 없는 성별을 가진 분이 쉽게 상상이 가능한 자세로 한쪽 팔은 옆 손잡이 위에, 두 손은 핸드폰.

 

그 날은 외투없이 긴 팔 블라우스 한 장만 입고 있었으니 아마 초가을이었던 것 같다. 인천으로 가는 퇴근 만원 전철이었고 나는 주로 문이 열리는 곳 반대 방향 문을 한 손으로 짚고 득도를 하고 있었다. 출입문이 열릴 때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내 영역 확인 차 주변을 둘러보다 옆 여성분의 에코백에 대중교통 임산부 배려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임산부 배려 좌석은 바로 내 왼쪽. 예비맘은 내 오른쪽. 하 또 고민이 차오른다.

여기 임산부 계시는 데 자리 비워주세요라고 하면 오지랖 대상을 받을 것 같았다. 여성분께 저 분께 자리 비워달라고 말해드릴까요라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오. 괜찮아요라는 답이 돌아올 게 뻔했다. 결국 네가 한 게 뭐냐 물으신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왜 시간이 몇 년이 지난 만원 전철이 아직도 생각나며 273km로 달리는 열차안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까.

남편의 말처럼 그냥 괜찮은 일인데 나는 왜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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